귀갓길
요즘은 아침저녁으로 걷기에는 참 좋은 계절입니다.
어제는 퇴근하면서 시내 중심가에 나갔습니다.
교보문고에서 한참이나 책들을 구경하다가
차비도 없고(ㅋㅋㅋ), 발이 편한 신발도 신었겠다 운동삼아 집까지 걸어서 가기로 했습니다.
2.28공원 벤취에 앉아서 공원옆 햄버그집에서 산 햄버그를 먹었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먹어본 햄버그가 5개가 될까요?
작년 10월 말레이시아 도시버스터미널에서 먹었던 것 빼고 말입니다.
아주 가끔씩은 햄버그도 먹을 만 했습니다.
중앙네거리에서 신호등을 건너고, 종각네거리를 향해 걸어갑니다.
종각네거리 KT건물 앞에 이르자
영화에서 봤던 그 아저씨가 서 있습니다.
“여보씨요? 아, 여보씨시오?? 이보시랑께요? 누구든 듣거든 대답을 하소!”
채플린씨가 지팡이를 짚은체 휴대폰으로 누군가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아, 아저씨 저 여기 있는데요? 도토리예요.”
“아, 거기 있었어요? 반갑쑤미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아, 아저씨 저도 반갑습니다.
제가 아저씨를 보고 싶어 하는지 우째 아셨어요?
황금시대인가 뭔가 그거 보고나서 아저씨가 보고 싶었거든요.”
“아, 그려요? 그런데 내가 수 년 동안 여기 이렇게 서서 ‘여보십시오?’ 했는데,
대답해 주는 사람은 ‘도토리’ 당신뿐입니다.”
“아, 그러셨습니까. 모두들 대답할 시간도 없이 바쁘셨나 봅니다.
외로우셨겠네요. 내일도 놀러올까요?”
그는 언제든지 환영한다 했습니다.
그러나 내일은 음악회 가기로 계획되어 있습니다.
채플린, 그를 만난건 30여년 전에 다니던 직장의 동료와 함께
카톨릭근로자회관에서 개설한 3개월 과정의 아카데미강좌를 신청해서 들을 때 였습니다.
그때 그 강좌에서 “황금시대”라는 영화를 상영해줘서 처음 봤습니다.
갑자기 그 동료가 생각났습니다.
역시 30여년 전에 결혼해서 부산으로 갔는데,
10여년 뒤까지는 서로 연락하며 지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연락이 두절되었는지 잊혀졌습니다.
오늘 저녁, 그녀도 채플린을 만나면 나를 기억할까? 궁금해졌습니다.
아쉬워하는 채플린과 헤어져 동신교로 가기 위해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훤하게 불켜진 종각주변에 오색등이 내걸려서 찬란합니다.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미리 연등으로 장식을 해 놓았나 봅니다.
오색등으로 인하여 한결 아름다워진 거리를 뒤로하고 횡단보도를 건넙니다.
전국장애학생체육대회가 열리나 봅니다.
선수단 여러분을 환영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습니다.
이런 대회가 전국규모로 있는지 조차도 몰랐는데,
참 세상일에 무심한 스스로를 반성하며 마음속으로 그들을 환영하면서 또 걷습니다.
웨딩샵을 지납니다.
예쁜 한복으로 진열장을 장식해 놓았습니다.
나는 한복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입을 기회가 없었습니다.
옛날처럼 어떤 모임에든 한복을 입어야하는 조건을 만들어 놓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처음 채플린을 만나게 해 주었던 아카데미강좌의 수료식때
어깨에 학이 수놓인 공단 한복을 언니에게 빌려서 처음 입었었고,
두 번째는 성당에서 영세받을 때 직장동료 한복을 빌려서 입었었고,
그 2년뒤 견진성사 받을때는 역시 한복을 입었었는데,
그렇게 세 번이었습니다.
아, 아버지 팔순잔치때 한복을 입었으니 네 번이네요.
그리고 지난 4월하순에는 조카 결혼식때 입을려고
다도하는 친구한테 한복을 빌려서 일본까지 싸들고 갔습니다.
일본 사람들에게 한복의 인기는 가히 폭발적이었고
한복을 입은 언니와 나를 보고 탄성을 질렀습니다.
괜히 제가 연예인이라도 된양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한류열풍의 영향 탓이기도 하겠지요.
어쨌건 한복이든, 한국사람이든 서로 관심을 가지고 친근하게 지낸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습니다.
웨딩캘러리 앞에서 서서 하던 한복 자랑은 그만하고 다시 걷습니다.
피아노 전시장 예정지를 지나자 스튜디오가 나옵니다.
귀여운 아가 사진이 커다랗게 걸려 있습니다.
나는 아기를 너무 예뻐합니다.
아기들을 만나면, 그냥 지나치려면 그렇게 서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꼭 아기와 눈이라도 맞추고 가려고 합니다.
그것마져 잘 안되면 아기를 향해 V자라도 그려주고 갑니다.
이 아기와도 마주서서 한참이나 대화를 시도했는데,
녀석은 방긋방긋 미소만 지을뿐 끝끝내 나와 눈은 맞추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 수 있게 해 줬으니 영광이지요.
또 다시 걷습니다. 동신육교가 나옵니다.
육교위에는 네온사인으로 육상선수의 모형을 그려놓았습니다.
역동적이지요.
작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때 대회를 홍보하고 기념하기 위해 장식해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네거리 맞은편에는 남성의류 전문점인 “턱시”가 있습니다.
유리창에는 “한 벌 사면 한 벌 더” 라고 적혀 있습니다.
나는 오라버니한테 문자를 넣었습니다.
“오라버니, 양복 한 벌 사 주까요?”
대답이 없더니 양복가게를 막 지나치려는데 답장이 왔습니다.
“니가 안사줘도 옷 많으니까 내 걱정 하지 말고, 니 옷이나 사 입거라! 고맙다!”
햐~~~~ 돈 벌었네, 진짜로 사달라고 할까봐 조마조마 했었는데.......
다시걷습니다.
집을 예쁘게 꾸며준다는 인테리어 가게를 지나고
신천대로 진입로에서 신호를 기다립니다.
교차로 옆에는 예전에는 아스팔트 위에다가 노랑색 선을 찍찍 그어 놓았었는데,
역시 작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예쁜 화단을 만들어 야생화를 심어놓았습니다.
신호가 바뀌고 드디어 동신교를 건넙니다.
동신교 다리도 역시 세계육상선수권대회때에
큰 바구니같은 화단을 만들어 매 달아 놓아서 예쁜 다리로 변했습니다.
동신교 건너에 즐비한 고층아파트에도 창문마다 불이들어와 있고
동신교 아래에는 죽을동 살동 모르고 운동하는 사람들이 무리지어 뛰고 있습니다.
다리끝 건물에는 적어도 30년은 더 넘은 듯한 피아노 가게가 있고
그 낡은 건물 타일벽을 타고 담쟁이 넝쿨이 긴 손을 뻗어 피아노를 치고 있습니다.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면 내가 염색약을 사는 화장품 가게가 있습니다.
나는 이 가게에서 언제나 "리체나 No.5"를 삽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제나 젊은 청년이 엄마와 함께 하는 과일가게가 있습니다.
나는 이 과일가게에서 방울토마토 5천원어치를 사서
손으로 쓱쓱 문지르고 먹으면서 청구네거리를 향해 걸어갑니다.
버스정류장에는 금방 야자를 마쳤는지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바글바글 거렸고,
나는 신호등 파란불이 깜박깜박하는 것을 보고 뛰어서 횡산보도를 건넙니다.
간판만 달아놓고 아직 개업하지 않은 한의원 옆에는
큰 교회가 공사중이라 가림막을 쳐 놓았고,
나는 이에폰을 꽂고 DMB를 켭니다. 뉴스가 진행되고 있나 봅니다.
‘대한불교진각종 시복 심인당’ 이라고 적혀 있는 간판앞에도
오색 연등이 내걸려서 반짝이고
그 연등불빛이 건너편에 있는 파출소까지 밝힙니다.
파출소 앞에 서서 사진을 찍으려고 카메라를 듭니다.
젊은 경찰관 한 분이 나오시더니
“아주머니, 뭘 찍으십니까?”
하십니다.
“너무 멋있어서 한 장만 찍으려고요.”
“하하하하, 아주머니도 참 제가 그렇게 멋있습니까?”
“아니요. 파출소 건물이요. ㅋㅋㅋㅋ”
“아, 진짜, 아주머니도 참......... 하하하하하하 실컷 찍으시소!”
경찰관이 호탕하게 웃으면서 잘 찍으시라며 비켜주십니다.
우리 동네에 다다르자 지름길로 가려고 좁은 뒷골목으로 들어섰습니다.
골목 안쪽에는 가끔씩 교복입은 중학생들이 모여앉아 뻐끔뻐끔 담배를 피우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늦여름이면 시멘트 틈바구니에서 싹을 틔운 과꽃이 아련하게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어둠과 맑음이 공존하는 곳이지요.
전봇대를 타고 올라 간 칙넝쿨은 얼마전만 해도
포도송이 같은 자주색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향기를 내품고 있었습니다.
좁은 뒷골목을 빠져 나오면 다시 큰도로가 나오고
작년 가을쯤에 이전개업한 칼국수 집이 있습니다.
밥해먹기 싫은 주말에는 이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사 먹어야지 했는데
아직 한 번도 이 식당에 들어가 본 적은 없습니다.
드디어 우리집 뒤 아파트가 보입니다.
걸어서 30분 쯤이면 도착하는 거리를 채플린과 아가와 얘기하느라,
그리고 DMB도 봐 가면서 오느라 한시간이나 걸렸습니다.
나는 가방에서 열쇠를 찾아 쥐고 계단을 올라갑니다.
토토리의 귀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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